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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택과 음택의 생기부자 되는 풍수이야기

   
▲ photo by lub
주택 대문 앞의 하천은 폭이 넓으면서 물살이 급하면 '무정수(無情水)', 또는 '할각수(割却水)'라 하여 재물이 빠져 나가며 오랫동안 계속해서 물소리가 들리면 마치 곡성(哭聲)처럼 들려 근심이 끊어질 날이 없다. 그러나 구불거리며 가늘게 흐르는 작은 개천은 구곡수(九曲水) 또는 유정수(有情水)라 하여 매우 길하게 본다.

평야에서는 '한 치만 높아도 산이요, 한 치만 낮아도 물이 된다(고일촌 위산, 저일촌위수 高一寸爲山, 低一寸爲水)'. 둔덕에 가깝게 주변의 땅보다 도드라진 곳이 있고, 그곳을 동그스름하게 감싸면서 물줄기가 흐른다면 바로 혈(穴)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비가 온 후 가장 빨리 마르거나 수증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는 것을 중심으로 하여 건물을 지으면 길한 땅의 기운을 받으므로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 또한 복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정확히 위치를 잡아야 한다.

지난주에 수도권에서 활동하고 있는 풍수지사들과 남헌 이준기 선생(저서.천풍지수)을 모시고 조선시대의 문신(文臣)이며 성리학자(性理學者)인 문효공(文孝公) 조익(趙翼.1579~1655) 선생의 무덤(예산군 신양면 신양리에 위치함)을 다녀 왔다.

선생은 1602년 문과에 급제한 후 삼사(三司: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을 통틀어 이르던 말)의 관직을 두루 거치는 중 1611년 김굉필(金宏弼) · 조광조(趙光祖)등의 문묘배향(文廟配享)을 주장하다가 고산 찰방으로 좌천되었으며, 인조가 즉위한 후 이조좌랑(吏曹佐郞)을 시작으로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개성부유수 이조참판.예조판서.공조판서 등을 역임 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80세의 늙은 아버지를 찾느라고 인조호종(扈從)을 하지 못했는데 호란 후 그 죄가 거론되어 유배당하였으나 정상이 참작되어 곧 석방되었다. 그 후 관직이 내렸으나 응하지 않다가 아버지의 상복(喪服)을 벗은 후 좌참찬(左參贊)이 되어 조정에 나아가 우의정.좌의정 등을 지냈다.

특히 성리학의 대가(大家)로 예학에 밝았으며 경학.병법.복술에도 뛰어났다. 서인의 영수(領袖)로 포저집이 문집으로 남아 있다. 조익 선생의 묘는 용맥의 기운이 대단히 좋고 당판(무덤을 포함한 주변)의 기가 응집되었으며, 입수(入首)의 마지막 1절은 생기(生氣)가 뭉쳐져서 금방이라도 분출될 듯한 형상이었다.

그리고 가장 인상적인 것은 좌.우 선익(蟬翼)의 뚜렷한 형상이었는데, 선익을 보면 가히 그 터가 명당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풍수 학인이라면 한번쯤 답사해보기를 권하는 바이다.

 

 

*주재민 소장은 풍수지리사.관상연구가.공인중개사(동트는빛부동산)로 현재 한국공인중개사협회 겸임교수, 김해대학 풍수지리학.관상학 겸임 교수를 각각 맡고 있으며, 마산대학 부동산학과 외래교수를 맡은 바 있다. 상담 및 안내문의.055)232-8882

 

주재민  joo4614@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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